아침부터 빠듯하다. 새벽 6시에 기상. 오늘은 리스본과의 작별을 준비하는 날이다.
우리가 며칠 간 지내왔던 바이샤지역(호시우광장)을 한바퀴 둘러본 후, 가보지 않았던 리스본 서쪽의 빌렝 지역을 맛본뒤 이 도시를 놓아 주기로 했다.
미션은 3개. 제한시간은 11시 30분까지. 요이땅이다!
1. 리스본의 상징, 28번 트램 타기
노란 28번 트램에 올라 리스본 시내의 골목골목을 유유히 관통한다.
좁은 주택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트램은 마치 군산을 달리는 듯한 느낌.
물론 여긴 군산보다 더 예쁘고, 골목도 더 아기자기하고, 트램도 노랗다. (차이점은 확실하다)
트램 바깥으로는 파스텔톤 주택들, 세탁물이 걸린 삶의 현장, 그리고 멀리 파란 테주강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 장면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어느새, 이 아기자기함과 순수함이 살아있는 리스본 바이샤 지역에 빠졌다는 사실을.
2. 포르투갈 최고의 에그타르트 맛보기
다음 목적지는 빌렝 지역.
여기는 우리가 리스본에서 아직 밟지 않은 땅.
그리고 이곳엔 포르투갈 국민간식 에그타르트의 본진, 바로 ‘파스텔 드 벨렝(Pastéis de Belém)‘ 이 있다.
이 가게는 하루에 무려 4만 개의 에그타르트를 판다고 한다. 계산해보면… 대충 하루 매출 10억.
작은 구멍가게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디저트계의 삼성전자쯤 된다.
맛은 역시 대기업급. 겉은 바삭, 속은 몽글, 혀는 감탄.
“비비고 만두가 괜히 비비고 만두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대기업의 맛을 이기기는 쉽지 않지.
나가며 우리도 4만개 중 일부가 되어 양손 두둑히 나오게되었다,,
3. 벨렝탑 보기
에그타르트에 취한 기분으로 근처에 있는 벨렝탑으로 향했다.
처음엔 이름만 듣고 또다른 디저트 가게인 줄 알았지만… 벨렝탑은 군사용 요새다.
16세기에 지어진 이 탑은 대포를 쏘며 리스본을 방어하던 중요한 거점이었고, 대항해시대의 상징이다.
바다로 떠나는 선원들이 이 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이제는 관광객들이 인증샷을 찍기 위해 두손을 벌리는 출항지(?)로 진화했다.
어디선가 쏟아져 나오는 단체 관광버스, 그리고 줄지어 내리는 각국의 노인들이 이 풍경을 완성시켰다.
가히 벨렝행 실버 특급열차.
미션을 모두 마친 지금, 리스본과의 작별을 천천히 준비한다.
다음 여정은 기차를 타고 포르투로 향하는 길.
하지만, 리스본이라는 도시가 내 안에 꽤 깊게 자리 잡았다는 걸,
말미암아 느낀다
묵직한 짐을 끌고 포르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포르투갈 여행 중 만난 수많은 이들이 말했다.
“리스본도 좋지만, 포르투는 더 좋았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기대치가 한껏 올라간 상태.
그리고, 드디어 포르투 도착.
근데 이게 왠걸?
수도는 리스본인데 더 수도 같은 활기가 포르투에 있었다.
리스본은 어디까지나 관광지 같은 조용한 도시 느낌이었다면,
포르투는 젊음이 흐르고 살아있는 느낌.
이쯤 되면 내가 수도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수도는 늘 북적북적하고 정신없는 도시여야 한다는… 뭐 그런 오해.)
우리는 포르투 도시 한가운데 에어비엔비 숙소를 잡았고, 대성공이었다.
넓은 거실, 높은 층고, 집 앞에 마트(핑고도스)까지 완벽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인원 수.
우리는 5명이었지만, 리스본에서 쓰던 예약을 그대로 가져와서
숙소는 4인 기준.
그리고 뒤늦게 확인한 우리는 ‘일단 가보자’고 조용히 합의했다.
그런데 이 숙소, 뭔가 이상했다.
집주인이 우리에게 직접 집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대표로 아빠, 큰누나, 나총 3명이 먼저 들어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포스가 장난 아니다.
블레이저에 안경. 말투에서 느껴지는 냉철함.
딱 봐도 “경험 좀 해본 사람” 느낌이었다.
짐을 보고 그녀가 묻는다.
“세 분 맞으시죠?”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예… 세 명이요.”
양심이 살짝 찔렸다. 아주 살짝.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복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집주인이 이 건물에 상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던 ‘열쇠만 던져주는 에어비엔비’가 아니었다.
이분은 거의 부동산 + 관리소장 + 감시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 하고 있었다.
큰누나는 급히 나가 가족회의 소집.
작은누나는 담담히 선언했다.
“정면돌파 하자.”
아빠와 나는 긴장한 채로 작은 구멍 사이로 상황을 지켜봤다.
누나는 집주인과 함께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고,
곧이어 문을 열고 배개와 침구 세트를 들고 들어왔다.
성공이다!
집주인은
“괜찮아요~ 불편하실까봐 걱정했어요.”
라고 말하며 웃기까지 했다.
이 해프닝은 나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 거짓말은 결국 들킬 수 있다.
- 혼란스럽다면, 간단하게 생각해라.
- 어쩔 땐, 정면돌파가 답이다.
짐 정리를 마치고 포르투 야경을 보러 나섰다.
동루이스 다리(Ponte de Dom Luís I).
포르투갈 사진을 검색하면 꼭 나오는 그 철제 다리.
우리는 다리를 건너 모루 정원(Jardim do Morro)으로 향했다.
다리 위에 올라섰을 때,
깊은 계곡처럼 펼쳐진 강 아래를 보니 손발이 촉촉해졌다.
허술한 난간, 까마득한 높이.
하지만 바로 그만큼 탁 트인 풍경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옆으로는 지하철(또는 트램)이 조용히 지나다녔다
차가 지나갈 땐 철길 옆으로 피해 있다가,
다 지나가면 철로 위를 걷는 것 역시 인상적이다
모루 정원은 마치 여의도 한강공원의 언덕 버전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노을을 바라보며 잔디 위에 앉아 맥주 한 잔,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 한 모금,
노랫소리와 노을에 젖어들어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속에 녹아들었다.
떨어지는 해, 젊은이의 버스킹 노래, 하루의 끝을 향한 안도감.
포르투의 노을 아래서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
균형의 서재